자본수지는 성장률, 이자율, 환차익 등이 결정한다
넷째, 경상수지가 대규모 적자일 때는 정책적으로 더 큰 규모의 외채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기도 한다. 경상수지가 적자라면 그만큼의 외환이 외국으로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외채를 들여오지 않으면 외환보유고가 고갈될 수 있기 때문에 외채를 정책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실제로 1996년에는 경상수지가 231억 달러라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는데, 자본수지는 233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외채를 대규모로 들여와 경상수지 적자를 메운 것이다.
이런 경우 외채가 누적되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만약 외채가 지나치게 크게 누적되면 언젠가는 외채상환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이에 따라 환율이 상승하면서 환차손을 발생시킴으로써 외채를 서둘러 상환하거나 상환받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결국 이런 움직임이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면서 1997년에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외환위기가 터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밖에 정치가 불안할 때나 경제가 파국적인 위기로 치달을 때는 국내 자본이 해외로 탈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역시 자본수지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과거 1960년대에 개도국들에서 군사쿠데타가 빈발했을 때는 국내 자본의 해외 탈출이 흔하게 벌어짐으로써 경제가 파국적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정치적 격변과 함께 경제적 위기를 맞았던 1980년대의 중남미 국가들도 국내 자본의 해외 탈출이 외환보유고의 고갈을 가속화시켜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은 바 있다. 이런 사태는 경제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이 정도 언급으로 마무리하겠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정치적 불안도 국내 자본의 해외 탈출을 조장함으로써 국제수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는 전제 조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 정치풍토의 정착은 나라의 장래를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경상수지는 가격경쟁력이 결정한다
경상수지는 무엇이 결정할까? 경상수지가 흑자라는 것은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이 수입보다 더 많다는 것을 뜻하고, 이것은 국제경쟁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국제경쟁력이 더 뛰어나야 수출이 수입보다 더 많아져 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하는 것이다.
국제경쟁력은 크게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이 모두 높거나 둘 중 하나가 더 높으면 국제경쟁력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의 구분은 현 경제학이 이를 지금까지 외면해왔다는 점에서 한층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렇다면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은 무엇이 결정할까?
먼저 가격경쟁력에 대해 살펴보자. 가격경쟁력은 국내 물가상승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을 때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생산성향상의 속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빠를 때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가격경쟁력은 이 둘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즉 물가상승률이 높더라도 생산성향상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다면 가격경쟁력은 향상되고 반대로 물가상승률이 낮더라도 생산성향상 속도보다 상대적으로 더 낮으면 가격경쟁력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향상의 속도가 낮을 때, 즉 경제성장이 정체되어 있을 때는 물가상승률이 가격경쟁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곤 한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 경제사가 여실히 증명한다.
해방 직후 극심한 경제난과 물가불안에 시달리던 우리나라가 1950년대 후반부터 경제도약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물가불안을 잠재운 1957년 이후부터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의 물가불안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쌀 한 가마의 가격은 1946년 3.6원에서 1952년에는 465원으로 6년 사이 130배가 상승했다. 1957년에는 다시 1,591원으로 상승해 11년 사이 무려 440배 이상 폭등했다. 쌀값 이외의 물가상승 역시 폭발적이었으며,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물가가 이렇게 불안하면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세계사적인 경험이다.
우리 경제가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왔던 미국의 무상원조가 1950년대 후반부터 차츰 줄어들자 이제는 자력으로 갱생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의 삶에 필수적인 자원과 상품을 우리 돈으로 해외에서 사와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외화의 획득이 필요했다.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출을 촉진해야 했고,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가격경쟁력의 확보를 위해 물가안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재정긴축과 통화긴축에 나설 수 밖에 없었고, 이 정책은 폭발적인 물가불안을 잠재우는 효과를 나타냈다. 1956년과 1957년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대로 떨어졌고, 물가가 다소 안정되자 1957년 성장률은 이례적으로 7.6%를 기록했다. 1958년 연말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1%로 뚝 떨어졌고, 이런 지나친 물가하락이 기업의 경영수지를 악화시켜 경기를 하강시켰지만 그래도 성장률은 비교적 양호한 5.5%를 기록했다.
물가가 안정되고 국제경쟁력이 살아남에 따라 1959년부터는 수출까지 비약적으로 증가해 우리 경제는 드디어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으며, 국제수지도 마침내 흑자를 기록했다. 물가안정이 수출의 폭발적인 증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1960년에는 부정선거와 정치 불안의 여파로 성장률이 1.9%로 떨어졌지만 1961년에는 4·19혁명이 터져 사회적으로 다소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4.8%라는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회복했다. 5.16쿠데타 직후에는 정책실패가 줄을 이으면서 성장률이 뚝 떨어졌지만 다행히 1963년부터는 사회가 안정되자 수출이 급증하면서 성 률도 다시 크게 상승했다.
이처럼 경제성장이 정체되어 있을 때는 물가안정이 가격경쟁력의 향상은 물론이고 경제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물가가 안정되면 수출의 가격경쟁력이 향상되고, 가격경쟁력이 향상되면 수출은 그에 따라 증가함으로써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불러오는 셈이다. 반면 경제성장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질 때는 물가상승률이 지나치게 높지만 않다면 생산성향상이 가격경쟁력을 유지시킨다.
실제로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선 다음인 1963년과 1964년에는 물가상승률이 20%대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수출증가율은 각각 58%와 37%를 기록했으며, 성장률 역시 각각 8.8%와 8.1%라는 비교적 높은 실적을 기록했다. 물론 높은 물가상승률이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려 국제수지를 악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1963년 경상수지는 1억 4,3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당시 수출액보다 1.6배나 더 큰 규모였다. 당연히 외환보유고는 고갈 직전에 이르러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65년부터는 강력한 안정정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고, 물가상승률은 10%대로 떨어졌다. 물가가 안정을 찾아가자 수출증가율은 1970년대 초반까지 매년 30~40%를 기록하면서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경제도약을 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했다. 특히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3%에 이르렀을 정도 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동안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13.9%에 이를 정도로 물가가 비교적 높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놀라온 경제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생산성향상 속도가 빠르면 물가가 웬만큼 불안하더라도 국제경쟁력은 이처럼 유지되는 셈이다.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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