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환율정책의 처참한 실패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심각한 물가불안에 시달렸다. 배급제가 해제되자 억눌렸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전쟁 직전에 물가보다 더 빠르게 상승했던 임금이 물가불안에 가세했다. 전쟁 중 이미 2배나 상승한 물가는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추가로 50% 상승했다. 이러한 물가상승은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켜 생산을 촉진함으로써 경기를 빠르게 상승시켰다. 회사 설립이 줄을 이었고 주식투자가 활기를 띠었다. 부동산투기까지 일어나자 물가불안은 더욱 심각해졌다. 물가불안을 방치하면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처럼 초인플레이션으로 발전하여 파멸적인 위기를 불러 올 위험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종전 직후 물가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통화긴축과 재정긴축을 시급히 시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처럼 긴축정책을 펼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19세기까지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이던 영국이 20세기 초부터 갑자기 경제적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는 금융업의 지나친 팽창이었다. 영국 금융업의 발달은 경쟁국인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의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그 나라들의 경쟁력과 성장력을 획기적으로 성장시켰다. 그 바람에 영국 제조업의 경쟁력과 성장력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영국의 경제적 패권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이 가장 먼저 회복시키려 했던 것은 바로 금융업이었다.
영국은 제조업의 경쟁력이 취약해진 상태에서는 금융업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그래서 런던을 금융시장의 메카로 회복시키고 파운드를 세계적인 기축통화로 복귀시키는 것이 영국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고 금융업을 되살리는 데 정책적 노력을 집중했다. 즉 전쟁 전의 평가에 입각한 금본위제의 복구로서 파운드의 가치를 전쟁 전의 금가격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금이 국제무역의 주요 결제수단이었고, 영국의 파운드는 가장 안정적인 국제통화였으므로 전쟁 전의 평가에 입각한 금본위제의 복구는 영국 금융업이 세계적인 패권을 되찾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졌다.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는 세계적으로 금본위제가 시행되었고 이는 국제 거래 안정에 기여했다. 런던은 국제금융시장의 중심이었으며 국제금융거래의 안정화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에는 주요국의 중앙은행들도 필요한 경우 서로 긴밀하게 협력했다. 이에 따라 국제무역과 금융업은 안정적으로 성장했고, 세계 경제는 물론 영국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따라서 금본위제가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는 믿음은 다른나라에서도 지배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영국은 더욱 그러했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 대륙 교전국의 거의 모든 산업을 처참하게 파괴시켰으나 영국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덕에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만큼 산업시설의 파괴나 금융시장의 혼란이 크지 않았다. 영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전쟁의 승리가 확실하진 1918년 1월 영국은 금본위제 복귀를 준비하기 위해 컨리프위원회Cunliffe Committee를 설치했다. 당연히 이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전쟁 전 평가에 바탕을 둔 금본위제의 복귀를 당면 목표로 확정했다. 그러나 이는 영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미국을 외면한 결정적인 실수였다.
물론 1920년 당시 영국의 금융업은 비교적 건전했고 은행시스템의 안정성도 최고 수준이었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그 존재만으도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만큼 그 지위가 확고했다. 만약 금융위기가 발생해 은행들이 지불불능 사태에 빠지더라도 잉글랜드은행은 최종 대부자로서 그 은행들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수 있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주었다. 실제로 1890년대 이후 영국에서는 금융시스템 미비와 같은 심각한 금융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은행들 역시 불황기에도 수익성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지 않았고 자기자본비율이나 현금 보유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금본위제 복귀를 가로막을 제약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20년 초 잉글랜드은행이 재무장관에게 보낸 한 메모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대변했다.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우선적이고 시급한 과제는 통화가치의 하락을 제거함으로써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목표는 통화가치 하락이 유발된 과정, 즉 현금과 신용의 인위적 창조를 역전시킴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적절한 수단은 이자율(인상)이다. 신용팽창이 중지되면 곧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물가하락 과정은 사회의 몇몇 계층에게는 분명히 고통스럽겠지만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 메모가 미리 내다본 것처럼 과거의 평가대로 금본위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영국 파운드의 과대평가는 수출산업을 위축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파운드의 평가절상에 따른 국제경쟁력의 약화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디플레이션정책을 펼침으로써 물가를 하락시켜야 했다. 그 결과 국내 경기는 분명 하강하고 실업률은 상승할 것이었다. 이는 임금하락과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저하를 가져오겠지만 이 정도의 피해는 금본위제 복귀를 위한 불가피한 비용으로 받아들여졌다. 금본위제 복귀가 불러온 효과, 즉 파운드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회복했을 때 나타날 경제효과에 대한 믿음으로 이 정도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본위제를 복구하기 전 영국 정부는 1920년에 금과 은의 유출을 통제 하기 위해 금은법Gold and Silver Act을 제정했다. 파운드의 평가절상을 단행하면 영국이 보유 중이던 금과 은이 대규모로 국외에 유출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랑스가 루르 지방을 점령하고 독일에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오히려 유럽 대륙의 금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1920년말 3.4달러였던 파운드는 1923년 봄 4.7달러로 상승했다(전쟁 전 공식 환율은 4.86달러). 파운드의 이러한 가치상승은 영국의 수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파운드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강력한 디플레이션정책을 실시했다. 주당 평균임금은 1921년 1월과 1922년 12월 사이 38%, 생계비는 50%나 하락했다. 이처럼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자 국내 경기는 빠르게 하강했고, 실업률은 15%로 급상승했다. 당연히 그 반작용이 강하게 일어났다. 취업난 극복을 위해 경기부양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운 노동당이 기어이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자 1923년 후반부터 영국의 국내 자본이 유출되면서 파운드가치는 4.3달러로 하락했다.
파운드 가치의 하락으로 자본유출이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현상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국내 경기가 더욱 악화되자 여론은 다시 반대로 바뀌었다. 노동당 정부는 1924년 2월에 컨리프위원회가 제안 한 파운드의 평가절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자본의 국의 유출이 중단되었고 파운드가치도 안정을 되찾았다. 때맞춰 세계 경기가 차츰 회복되어 영국의 국내 경기도 상승으로 돌아섰고 실업률은 감소하기 시작 했다. 드디어 금본위제의 복귀를 위한 여건이 조성되었고, 잉글랜드은행은 전문가위원회의 설치를 노동당 정부에 요청했다.
전문가위원회는 1924년 여름에 청문회를 개최했다. 케인스와 레지날드 맥케나Reginald Mckenna를 제외한 모든 증인들이 영국이 파운드를 전쟁 전의 평가로 복귀시킬 수 있다는 데 낙관적이었다. 구매력 평가의 추정치는 영국의 물가가 약 10%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잉글랜드은행의 몬태규 노먼Montagu Norman 총재를 제외하고는 케인스를 비롯한 대다수 관측통들은 미국의 물가가 상승하고 그 사이 영국의 물가수준이 일정하게 지켜지면 이러한 격차가 해소될 것이라 믿었다. 대다수 관측통들은 미국의 물가가 상승하지 않더라도 영국의 물가를 10% 더 인하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물가하락이 얼마나 파괴적인 악순환을 일으킬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물가하락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생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생산을 위해서는 생산시설을 미리 건설하고 사전에 고용과 원자재 구매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생산시설과 고용, 원자재 등에 미리 비싼 값을 지불했는데, 판매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면 기업의 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이 줄어들면 생산과 투자와 고용 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기위축은 수요를 축소시킴으로써 가격하락의 압력을 키운다. 그리고 가격하락의 압력은 위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기를 위축시킨다. 가격하락과 경기위축이 악순환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영국 경제는 이 악순환 과정에 들어서고 말았다.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당이 된 노동당 정부는 불과 9개월 만에 무너지고 그 뒤를 이어 보수당 정권이 다시 들어섰고, 금본위제 복귀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재무부 장관에 부임했다. 이에 따라 파운드가 평가절상될 것이라는 기대심리에 의해 파운드가치는 자연스럽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투기바람이 가세하면서 파운드는 4.795달러까지 뛰어올랐다. 이처럼 파운드의 가치가 상승하자 마침내 1924년 3월 2일 금본위제 복귀가 최종적으로 결정, 4월 28일에 발표되었다. 금본위제법Gold Standard Act은 이듬해 1925년 5월 14일에 입법되었으나 실제로는 발 표 당일부터 시행되었다.
전쟁 전의 평가대로 금본위제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은 당연히 영국을 다시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복귀시키겠다는 데 있었다. 영국이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파운드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그 가치가 안정적이라고 믿게끔 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 전의 파운드의 평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물가와 임금을 하락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고금리정책을 비롯한 강력한 긴축정책을 펼쳐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디플레이션이라는 너무도 가혹한 고통이었다. 물가가 하락하는 가운데 경기가 급속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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