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와 통화제도의 개략적인 역사
거래는 분업을 이뤄지게 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켰고 기술발달에도 기여했으며, 시장을 출현시켜 경제의 규모를 키우는 등 경제발전에 있어 여러가지 중요한 역할들을 했다. 태초의 거래는 물물교환이었고 거래품목이 곧 거래수단이었지만 이때는 거래 당사자 쌍방의 필요가 일치해야 거래가 이뤄졌으므로 성사가 그만큼 어려웠다. 이때 탄생한 화폐가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함으로써 거래가 더욱 촉진되었고, 거래가 늘어나자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희귀한 물품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희귀해야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희귀해서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변질되지도 않는 은과 금이 물품화폐 역할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은과 금은 거래 시 매번 중량을 달아야 하는 불편함이 따랐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은화와 금화였다. 일정한 중량의 은화와 금화가 등장하면서 거래는 더 편리해졌고 이에 따라 경제가 발전하고 거래 규모가 커지면서 은화와 금화는 화폐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그런데 금과 은의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경제는 성장하는 유기체로서 성장과 순환이 순조롭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통화의 공급이 안정적으로 증가해야 했지만 새로운 광산이 별견되기 전까지는 이것이 불가능함에 따라 나타난 추가적인 화폐공급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웠고 오히려 새로운 금광이나 은광이 발견되면 그 공급량이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함으로써 물가불안을 초래했다. 또한 공급량이 제한되어 있을때는 통화부족으로 경제의 순환과 성장에 지장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거래 규모가 더 커졌고, 규모가 커지자 은화와 금화의 중량도 더 무거워져 그만캄 불편함도 커졌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금은본위제였다.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금과 은을 쌓아둔 비율만틈 지폐나 증서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대양항해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거래 규모가 획기적으로 증가한 것이 금은본위제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거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금과 은의 수요도 그만큼 커졌는데, 금과 은의 공급이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금본위제의 탄생으로 실제로 보유한 금과 은보다 더 많은 액수, 즉 그 몇 배의 화폐를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은본위제가 대세였으나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금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금과 은을 모두 화폐발행의 기초자산으로 삼는 복본위제가 나타났다. 그런데 17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 영향력이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파급된에 따라 경제 규모가 더욱 커졌고 상대적으로 금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또한 복본위제는 금과 은의 가격비율이 수시로 변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생산이 더 많이 이뤄지는 쪽의 가격이 더 낮아졌지만 일반적으로는 금의 가격이 은의 가격보다 점점 비싸졌다. 금과 은의 가격비율이 이처럼 변동하자 복본위제의 유지가 불편해짐에 따라 복본위제는 금본위제로 이행해갔다. 금을 유일한 화폐발행의 근거로 삼게 된 것이다. 당시 세계 경제를 선도하던 영국이 19세기 말엽에 금본위제를 채택함에 따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 등도 그 뒤를 따랐다. 영국을 뒤따라가거나 추월하기 위해서는 금본위제의 채택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본위제 역시 경제발전에 따른 화폐의 추가적인 수요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 금을 보관한 수량과 지폐발행량 사이의 비율을 점차 낮춰 감으로써 그 수요에 언 정도 부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 사이 영국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2% 내외에 불과했던 데는 통화부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금본위제를 오랜 세월 동안 고수했을까? 그것은 물가불안이 불러왔던 역사적 재앙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실제로 물가불안은 거의 모든 국가 혹은 경제를 무너뜨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본위제가 항상 유지된 것은 아니다. 전쟁 시에는 금본위제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기도 했다. 전쟁은 재정수요를 극단적으로 팽창시키기 마련인데, 주로 정부채권 발행이나 화폐의 추가발행을 통해 조달되곤 했다. 전쟁비용의 조달을 위해 추가적으로 발행된 화폐와 채권은 당연히 물가불안을 일으켰으며, 금의 시장가격은 화폐가치에 비해 크게 상승하곤 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물가불안을 잠재우고 금의 시장가격을 화폐가치와 일치시키기 위해 흔히 강력한 긴축정책이 시행되었다. 물가를 낮춰야 화폐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고, 화폐의 가치를 상승시켜야 금의 시장가격과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물가를 낮추기 위한 강력한 긴축정책은 심각한 경기후퇴를 부르고 실업율을 급상승시켰으며, 경기후퇴와 실업률 상승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긴축정책을 통해 화폐의 가치를 상승시켜 금의 가치상승을 시도한 것은 국제경쟁력 때문이다.
자국이 생산하는 재화의 가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높으면 국제거래에 있어 가격경쟁력이 떨어졌다.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 국제수지가 적자로 돌아섬으로써 국제교역의 거래수단인 금이 해외로 유출되었고 국내 통화량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극심한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나면서 경기가 극단적으로 급강하기도 했다. 금본위제를 고수하는 한 이 같은 긴축정책은 필수적이었는데, 긴축정책은 흔히 정치적 소요를 불러일으키곤 했으며 이는 금본위제의 유지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은 금본위제의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공황이 닥친 뒤 경기가 급강하하고 실업률이 급상승하면서 수입품의 국내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 보호무역주의가 유행병처럼 전 세계를 덮치면서 경제는 더욱 심각한 파국적 위기로 빠져들었다. 여기에 금본위제를 고수했던 정책도 경기하강을 더욱 부채질했고, 결국 공황이 점점 더 심화되자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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