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경제학과 영국의 경기회복
당시 이와 같은 영국의 경제난에 대해 케인스는 저축의 과잉, 즉 투자의 과소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분석했지만 이는 금본위제가 경제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영국의 상황과 배치된다. 케인스의 분석은 틀렸다. 저축과잉 혹은 투자과소는 경기부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경기부진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분명 저축과잉이든 투자과소든 어느 쪽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이전까지는 저축과잉이나 투자과소로 인해 영국이 경제난을 겪은 일이 거의 없었고, 있었더라도 일시적인 상황에 불과했다. 케인스의 분석은 저축과잉이나 투자과소가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필수적인 고찰을 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현 경제학은 케인스경제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효수요의 부족이 대공황의 원인이라고 가르치지만 이것 역시 틀렸다. 유효수요의 부족은 대공황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공황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경제병리학을 다루면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케인스가 범한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경제를 순환체로만 인식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순환체에서는 투자가 저축보다 적을 경우 유효수요가 부족해짐으로써 경기는 하강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제는 순환과 함께 성장도 하는 체제다. 순환과 성장이 동시에 이뤄지는 경제에서는 투자와 저축이 균형을 이루더라도 고용이 좀처럼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기도 한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소멸하는 산업 분야의 고용을 새로 부상하는 산업 분야가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생산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장률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비로소 고용이 증가한다. 노동집약적 산업의 고용을 자본집약적 산업이나 기술집약적 산업이 흡수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은 성장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케인스는 재정지출의 확대가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면 고용이 충분히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
케인스의 분석이 틀렸다는 것은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자마자 경기가 상승으로 돌아섬으로써 바로 밝혀졌다.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뒤 저축과잉 혹은 투자과소가 여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상승으로 돌아선 것이다. 만약 케인스가 제안한 바대로 재정지출을 증가시켜 유효수요를 창출했다면 당시 영국은 경제난이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재정지출을 증가시켰다면 영국의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은 더욱 취약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의 재정정책을 펼쳤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의 점진적 약화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케인스는 경제학 혁명이 아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케인스는 영국이 경제난에 시달리던 1920년대 중후반, 장차 금리가 하락할 것이기에 경기가 상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금리가 하락해도 경기는 살아나지 않았고 심지어 실업률이 치솟는 등 경기하강이 심각해지자 관세인상 등 보호무역을 제안하고 옹호했다. 그러나 보호무역은 세계대공황을 심화시키고 장기화시킨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케인스의 거듭되는 실수로 볼 때 그가 주장한 유효수요이론의 기초인 저축의 역설, 즉 저축은 개인적으로는 미덕이지만 국가적으로는 재앙이라는 판단 역시 틀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케인스가 경제학 혁명을 일으켰다고 칭송하기에 바빴다.
물론 한때는 케인스경제학이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재정정책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장기 번영을 부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성공은 케인스의 경제정책이 아니라 국제무역 질서를 확립했던 GATT와 국제금융질서를 확립했던 IMF에 의해 이뤄졌다. IMF와 GATT가 국제교역을 획기적으로 신장시킴으로써 거의 모든 나라들이 공동으로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이다. 케인스의 경제정책은 당시에는 운이 좋았지만 그때부터 이미 실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실제로 케인스의 경제정책을 충실히 따랐던 미국과 영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 쇠락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케인스경제학의 영광도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비록 케인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 혁명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가 경제학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특히 거시적 관점의 중요성을 경제학에 대두시킨 공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시적 관점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국내총생산 등과 같은 각종 거시지표들이 개발됨으로써 국민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거시지표들을 통해 공황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예방이나 적절한 처방이 가능해졌다. 그 후 세계대공황과 같은 비극적인 사태가 재현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위대한 업적이라 할 만하다.
금본위제 폐지 이후 영국 경제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우선 금본위제를 포기하자 파운드의 가치가 크게 떨어져 수출산업의 국제경쟁력이 살아났다. 또한 금본위제의 유지를 위해 시행했던 긴축정책의 족쇄가 풀려 1992년부터 통화정책이 팽창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경기상승에 힘을 보탰다. 그 결과 세계 대공황의 발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다른나라들과 다르게 영국 경기는 하강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경기회복이 미미하긴 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황의 늪에 빠져든 것과 비교할 때 이 정도는 굉장한 성과였다.
실제로 주요 국가들 중 공업생산이 1929년 수준을 최초로 넘어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공업생산지수는 1929년 4/4분기의 114(1924년 기준)에 비해 1934년 4/4분기에는 116에 달했다. 부분적으로는 1920년대 내내 경기 확대가 미약한 것을 반영했지만 금본위제의 포기와 그에 따른 평가절하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금리정책을 유지해야 했는데 금본위제를 포기하자 금리를 본격적으로 인하할 수 있었고 이것이 경기를 확대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영국의 금리는 2%까지 떨어졌고, 이 같은 저금리 상태는 193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영국이 세계적인 금융업의 패권을 탈환하고자 했던 것과 이를 위해 환율하락(파운드 평가절상)을 전제로 한 금본위제에 집착했던 것이 얼마나 심각한 후유증과 부작용을 빚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펼쳐진 영국의 환율정책은 이처럼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는 영국 경제로 하여금 1920년대 내내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했고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 때는 오히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 호조를 보였다.
반면 영국이 환율정책의 실패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1920년대 중후반에 프랑스의 환율정책은 성공을 거둬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호조를 지속하자 프랑스는 세계 경제의 패권을 노리고 영국의 뒤를 따라 금본위제 유지에 집착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국내 경기는 영국처럼 급락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당시 프랑스의 환율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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