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가치의 새로운 개념
현대경제에서는 중앙은행이 화폐발행에 관한 전권을 쥐고 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화폐를 찍어낼 수 있는 셈이다. 발행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돈이 너무 많이 풀리면 물가가 뛰고 물가가 뛰면 돈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돈의 가치가 너무 떨어지면 신뢰도 함께 무너지면서 화폐는 돈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화폐가 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면 다른 재퐈들이 화폐를 대신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결국 돈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그 결과 교환 또는 겨래가 더 어렵게 되어 최악의 경우 축소재생산의 악순환이 벌어짐으로써 경제가 무너지고 만다. 심지어 분업체제와 시장까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돈이 많이 풀리면 왜 돈의 가치가 떨어질까? 이 물음에 대해 현 경제학은 P=MV/Q(P는 가격, M은 통화량, V는 유통속도, Q는 생산량)라는 통화수량설 수식으로 답변한다. 통화는 실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돈의 가치를 현 경제학처럼 무게의 개념으로 받아 들이면 돈이 늘어난 비율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게 되는데, 이는 돈이 많이 풀리면 가치가 떨어지는 이유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현실경제는 시간이 흘러가는 3차원의 세계로서 돈에 대해서도 운동에너지의 개념을 요구하는데, 이는 돈의 가치를 동태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경제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정지해 있는 물체의 무게를 측정하기 위해서느느 저울이라는 척도만으로 충분하지만 움직이는 물체는 저울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인 이치다. 움직이는 물체는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가 운동에너지르르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경제도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며 성장한다. 어떤 때는 빠르게 순환하고 어떤 때는 느리게 순환한다. 어떤 대는 빠르게 성장하고 어떤 때는 느리게 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동하는 경제는 재화의 가치를 무게의 개념이 아닌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구체적인 예로, 현 경제학은 돈의 가치가 그것이 어디에 있든 똑같다고 간주한다. 내 손안에 있는 1만원이나 은행에 있는 1만원이나 똑같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틀렸다. 내 손안의 1만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이자를 주고, 내가 은행에서 1만원을 빌리면 이자를 내야 한다. 이처럼 돈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위치에너지 때문이다. 빌리는 입장에서는 은행의 위치가 내 호주머니보다 높기 때문에 위치에너지를 갖는다. 예금하는 입장에서는 그 반대다. 따라서 돈이 내 호주머니에서 은행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자라는 운동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의 개념을 도입하면 화폐발행이 왜 물가를 상승시키는지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흐르는 물에 돌을 하나 떨어뜨리면 물의 흐름이 느려진다. 새로 발행된 화폐도 마친가지다. 다른 재화들의 운동에너지를 빠앗으면서 자신의 운동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화폐발행은 이 과정을 통해 재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물가상승을 일으킨다. 따라서 화폐발행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점진적인 물가 상승이 불가피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흔히 화폐는 중앙은행의 국민경제에 대한 부채이며, 통화는 통화금융기관의 국민경제에 대한 부채라고 정의한다. 화폐나 통화는 신뢰를 바탕으로 그 가치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부채가 커질수록 신뢰와 그 가치도 떨어진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 일반 기업에서처럼 부채가 적당히 커지더라도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부채도 더 커질 것을 요구한다. 통화와 소득과 가격은 삼쌍성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겨래량이 많아지면 통화량이 많아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통화의 증가와 신뢰성 확보가 어떻게 동시에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물가안정에 달려 있다. 해답은 이미 주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즉 통화가 운동에너지만 충분히 갖출 수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통화가 경제의 순환과정에서 창출된다면, 그래서 스스로 운동에너지를 갖출 수 있다면 통화가치의 하락을 막을 수 잇는 것이다. 현실경제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금융업의 발달과 새로운 금융상품의 개발이 이를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자.
재화의 종류와 통화의 기본기능
이 세상의 재화는 크게 2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소비하는 즐거움을 주는 재화고, 다른 하나는 돈 버는 즐거움을 주는 재화다. 전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것으로서 시장에서 흔히 보는 상품이다. 현 경제학은 이 재화를 중심으로 이론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흔히 전자만 상훔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재화 못지않게 중요한 재화가 돈을 벌어주는 재화다. 현 경제학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재화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고 있어 경제를 읽어내는 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후자는 어떤 재화이고, 경제에서 어떤 기능을 할까?
돈을 버는 재화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반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시설, 사무실 및 사업시설이나 주택 및 땅과 같이 부동산시장에서 거래되는 갖공 부동산, 주식과 채권을 비롯한 각종 증권 등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금융상품, 외환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환과 외환선물 등 각종 외환상품 등이 있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도 이에 속한다. 현실적으로 기업도 인수합병(M&A)을 통해 종종 거래되곤 하며 경영권을 매매하는 경우도 있다. 기업 역시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의 일종인 셈이다. 그 밖에 상표권이나 권리금이 붙어 거래되는 임대 상점도 이런 재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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