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환율정책의 성공과 실패
1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서 독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을 권리를 확보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고 1870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한 바 있었으므로 프랑스가 패전국인 독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까지도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각종 기간시설과 산업시설 복구에 나섰다. 재정지출 확대에 따른 재정적자는 독일로부터 전쟁배상금이 들어오면 해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독일 경제가 역사상 유례없는 천문학적인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심각한 경제난에 처하자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어렵게 되었다(당초의 전쟁배상금 규모도 계속 줄여주지 않을 수 없었고, 1932년 로잔회의에서 나머지 배상금도 말소시켜줬다). 프랑스는 당연히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었고 프랑스 경제에 대한 국내외의 신뢰도 역시 점점 떨어졌다. 여기에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에 대해 70억 달러에 달하는 전쟁채무를 지고 있어 이를 상환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전쟁채무의 대부분이 단기 형태여서 채권자들은 자신들의 자산을 단기간에 현금화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프랑의 가치는 급속히 떨어지면서 프랑스에 들어온 외채는 물론 국내 자본까지 환차손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대거 빠져나가고 말았다. 프랑스는 심각한 신용경색에 빠져들었고 경제난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경제난이 심화되자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1924년 9월부터 1926년 7월 사이 정권이 거의 열 차례나 바뀌고 재무부장관도 열 번이나 바뀌었다. 하원으로부터 예산안 승인을 받지 못하고 프랑스은행Bank of France에서 융자를 거절당하면 재무부장관은 실각하고 대개 내각도 무너지는 식이었다. 이러한 정정의 불안은 프랑에 대한 국내외의 신뢰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1925년 초 파운드당 90프랑이었던 환율은 1926년 4월 중순에 145프랑까지 치솟았고 5월 중순에는 다시 175프랑으로 올랐다. 1년여 사이 프랑의 가치가 50% 가깝게 떨어진 셈이다. 환율이 이처럼 폭등하고 경제가 점점 더 불안해지자 브리앙 내각은 물러났고 그 뒤에 새로 등장한 에리오Heriot 내각도 불과 나흘 만에 무너졌다. 브리앙 내각이 무너진 1926년 7월 17일에는 환율이 다시 220 프랑으로 치솟았고 에리오 내각이 무너진 7월 21일에는 243프랑으로 올랐다. 불과 1년 반 만에 90프랑이던 환율이 거의 2.5배 이상 오른 것이다. 이에 따라 물가가 앙등하는 등 경제는 더욱 불안해졌고 정권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에리오 내각의 뒤를 이어 푸앵카레 내각이 들어섰다. 재무부장관을 겸임한 푸앵카레Raymond Poincar는 첫 업무로 감세조치를 시행했다. 이는 그동안 경제전문가들이 권고했던 세금증액을 정면으로 배척한 것이지만 이 조치가 오히려 자산계급의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이를 계기로 외국으로 탈출했던 프랑스 자본이 되돌아왔고 환율은 당연히 떨어졌다. 7월 25일에는 199프랑으로 떨어졌고, 26일에는 다시 190프랑으로 떨어졌다. 프랑의 가치가 이처럼 상승하자 외국으로 도피했던 자금들이 더 많이 돌아왔고, 이것이 선순환을 일으켜 프랑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켰다. 10월 말에는 이미 160~170 프랑으로 떨어졌던 환율이 다시 추가로 하락했다.
환율이 이렇게 계속 떨어지자 프랑스의 국내 산업은 가격경쟁력 약화에 직면했다. 특히 자동차업계는 환율하락을 막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벌였고, 노동계 역시 강력하게 항의했다. 경제전문가들도 프랑의 가치가 너무 상승하면 영국처럼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국내 산업이 전반적으로 파멸적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푸앵카레 내각은 120프랑에서 환율을 안정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이 역시 여전히 높은 수준이었다. 1년여 전에는 환율이 90프랑이었으므로 25% 이상 상승한 것이고, 전쟁 전에 비해 6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처럼 과소평가된 프랑의 가치는 프랑스의 수출품 및 수입경쟁품 생산에 보조금을 지급한 꼴이었다. 이에 따라 경상수지는 지속적으로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고 환율하락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커졌다. 환차익이 기대되자 프랑스 자본은 물론이고 외국계 자본들까지도 프랑스로 이동했다. 외국으로 유출되었던 프랑스의 자본은 1925년부터 1926년 초까지 거의 대부분 돌아왔고, 이로써 프랑의 가치는 더욱 상승했다.
프랑스은행은 환율하락을 억제하기 위해 외환을 매입했다. 1926년 11월부터 서서히 매입을 시작해 1927년 초까지 그 규모를 점점 더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율하락의 압력은 점점 더 커졌고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지자 프랑스은행은 1927년 4월 말에 잉글랜드은행의 차관을 상환했다. 잉글랜드은행은 프랑의 가치가 계속 더 오를 것으로 확신하고 프랑의 보유를 늘렸다. 다른 외국자본들도 프랑스의 환율하락을 예상하고 외환투기를 시작함에 따라 자본수지 흑자는 더욱 커졌다. 프랑스은행 외환보유고는 1926년 11월 530만 파운드에서 1927년 2월 말에는 2,000만 파운드에 달했고, 5월 말에는 1억 6,00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프랑의 가치가 상승한 반면 파운드의 가치가 하락하자 프랑스은행의 외환보유고는 환차손을 입게 되면서 프랑스은행은 보유 중이던 파운드를 금으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은행과 잉글랜드은행은 이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했다. 잉글랜드은행은 프랑스은행의 외환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프랑의 가치안정을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은행은 영국이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외국으로부터의 자본유입이 국내 경기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고 판단해 프랑의 가치가 더 상승하기를 바란 반면 영국은 경기하락을 염려해 금리를 인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은 금본위제 유지를 위해 긴축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영국 경제의 어려운 처지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프랑의 상대적인 저평가로 수출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무역수지는 여전히 대규모 흑자를 기록 중이었고, 외환보유고는 점점 더 쌓여 갔다. 프랑스의 국내 경기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호조를 보였고 재정수지까지 흑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을 비교적 잘 버텨냈다. 세계대공황이 터졌던 1920년대 말 프랑스의 붐은 1913년이나 1924년과 비교해도 오히려 나았을 뿐 아니라 지속적이기도 했다. 공업생산은 미국에서 경기후퇴가 시작된 1929년이 아니라 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진행한 1930년 상반기에 정점에 도달했고, 1931년까지는 감퇴하지 않았다. 1929년에 도달한 기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 생산지수를 보면 1927년의 110에서 1929년에는 139.5로 상승했다.
프랑이 안정된 후 프랑스 정부 예산은 거액의 흑자를 시현하여 프랑스 은행에 대한 정부채무가 모두 반제되었고, 증권의 가격도 2배로 등귀했다. 1929년 후반 재무부장관인 앙리 세롱은 1926년 7월에 불과 100만 프랑밖에 없던 국고에 현재는 170억 프랑의 잉여금이 쌓여 있다고 발표했다. 이 당시만 해도 프랑스 경제의 이러한 호조가 나중에 비극의 씨앗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부터 그 사연을 살펴보자.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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