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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지식 - 프랑스 환율정책이 성공과 실패(2)

by 별헤는 소년 2022. 5. 8.

프랑스 환율정책의 성공과 실패

  프랑스의 외환보유고가 급증하자 통화팽창과 그에 따른 기분안에 대 우리가 대두했다. 그래서 외환보유고를 런던 금융시장에 예치했고, 이 것으로도 부족해 파운드 선물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그 결과 프랑스은행이 보유한 현물 및 선물의 외환총액은 1928년 5월에 14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프랑스은행은 채권을 보유한 나라들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은행과 잉글랜드은행은 유럽의 약소 통화들의 안정화정책에 있어 누가 지도권을 행사하느냐 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정치적 패권을 둘러싼 이러한 인식이 프랑스에 심각한 경제난을 불렀고, 나중에는 독일에게 점령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외화자금의 해외 예치는 국내 소득의 해외 이전을 의미했고, 국내 소득의 해외 이전은 내수의 부진을 의미했다. 수출이 호조를 지속하는 가운데에서도 국내 경기는 상대적으로 더 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의 저평가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수출이 계속 호조를 보이고 외환보유고가 점점 더 많이 쌓이자 프랑의 가치는 상승압력을 더 강하게 받아 줄기차게 상승했고 결국 1931년 하반기를 넘어선 뒤에는 프랑이 파운드에 대해 과대평가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소비Alfred Sauvy는 프랑스와 영국의 소매가격을 비교함으로써 프랑의 과대평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1931년 연초에는 프랑스의 소매가격이 영국보다 14%나 낮았는데, 그 후 차츰 상승해서 9월부터는 두 나라의 소매가격 수준이 거의 비슷해졌고 연말에는 프랑스 소매가격이 18%나 더 비싸졌다는 것이다. 프랑의 과대평가는 1934년 2월에 26%로 정점에 달했다. 프랑스의 수출에 대한 압력은 정말 심각했다. 월평균 수출액은 1930년의 36억 프랑에서 1932년에는 15억 프랑, 1935년에는 13억 프랑으로 감소했다. 대공황에 따른 세계적인 교육 부진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프랑의 과대평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수출이 부진해지자 국내 경기 역시 큰 타격을 입으며 수입도 급감했다. 월평균 수입액은 1930년 44억 프랑에서 1932년 25억 프랑, 1935년에는 17억 프랑으로 감소했다. 특히 1932년부터 1935년에 걸친 감소는 세계 무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섬유, 의류, 피혁제품 수출은 자동차보다 훨씬 큰 타격을 받았다. 소비재는 세계적인 관세와 쿼터 규제로 인해 더욱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격상의 불리함 역시 심각했다. 프랑의 상대적인 과대평가는 그만큼 심각했다.

  1931년 중반에는 영국 파운드에 대해 그 가치가 40% 가까이 한꺼번에 상승하기도 하는 등 폭등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프랑의 이런 고평가 행진은 1936년 말까지 5년 이상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으며 외환보유고도 점차 줄어들었다. 프랑의 가치를 정상화시키고 외환보유고 고갈을 막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것이 순리였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스는 영국의 실패를 그대로 뒤따랐다. 국내 물가를 떨어뜨려 국제수지의 호전을 도모하는 디플레이션정책을 펼친 것이다.

  실제로 도매물가가 1931년의 462에서 1932년에 407, 1933년에 388, 1934년에 366, 1935년에 347로 하락하는 등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역대 정권은 자의 삭감, 특히 연금생활자와 퇴역군인에 대한 지출 및 공무원 급여를 인하함으로써 예산을 균형화시키고자 했지만 이 노력은 강력한 반대에 봉착했다. 연금생활자나 퇴역군인 그리고 공무원은 물론이고 노동자들까지 이 정책에 반발하고 나섰으며, 그 바람에 사회적 결속력은 파괴되고 말았다. 결국 이로 인해 빈번한 정권교체가 시작되었다. 1932년과 1934년에는 네 차례, 1933년에는 세 차례 정부가 교체되었다. 이러한 정치불안으로 인해 경제는 더욱 불안정해졌고 국내 자본이 해외로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경제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디플레이션정책에 항의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사회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인민전선Popular Front을 결성했고 일반 노동조합은 공산당 계열의 노동조직과 합병했다. 조선소, 항만, 트럭공장 등 여러 곳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 파리에서는 금속산업을 중심으로 총파업이 벌어졌고 노동자들은 점거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사회불안이 극심해지자 1월에 집권했던 사로Saurrault 정권도 결국 붕괴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의 정국불안이 심각해지는 와중에 히틀러의 독일군은 라인린트에 진주해 요새 구축에 들어갔다.

  정권을 인수한 인민전선은 당면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비전이나 정책 혹은 전략이 없었다. 기껏해야 디플레이션의 포기, 독점의 강력한 관리, 농산물 투기 억제, 부정부패 척결, 탈세방지 등의 정책과 함께 의무교육 기간 연장, 연금생활자 및 퇴역군인의 권리 존중, 사회보장의 유지, 주 40시간제의 도입 등을 내세운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경제난 악화의 결정적 원인이었던 프랑의 과대평가와 그에 따른 국제수지 악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준비하지 못했다. 급기야 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이 일어났고 국내 자본의 해외 탈출이 이어졌지만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인민전선이 최초로 취한 조치는 임금인상과 3주간의 유급휴가 및 40시간제를 규정한 마티뇽 협정Accord de Matignon에 고용주들이 서명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마티뇽 협정은 고용주에게는 굴욕이었으며 모든 사람에게는 재분이었다. 임금은 최하층 노동자의 경우 15%, 최상층 노동자의 경우 7%가 인상되는 등 대부분의 공장에서 평균 12%가 인상되었다. 유급휴가 및 주40시간 근무제 역시 비용을 상승시켰다. 도매물가는 1936년 5월의 375에서 9월에는 410으로 상승하고(1913년=100), 소매물가는 76.4에서 80.5로 상승했다(1930년=100). 그 결과 수출은 파업이 끝났어도 회복되지 않았고, 주가는 하락하고 자본유출은 심화되어 결국 평가절하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물가불안은 그렇지 않아도 프랑의 과대평가로 취약해진 프랑스의 국제경쟁력을 더욱 약화시켰고, 이에 따른 프랑의 평가절하는 다시 물가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악순환을 일으켰다.

  당시의 세계 경제는 1932년부터 다소간 회복되기 시작했고 회복세는 미약했지만 1937년까지 지속되었다. 오직 프랑스의 경제난만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제조업생산의 증가율이 주요 공업국 중 프랑스가 가장 낮았다. 1932년부터 1938년 사이에 독일과 미국의 공업생산은 아래 표에서 보듯이 거의 2배 증가했고, 일본 역시 1.8배 증가했다. 경제회복이 상대적으로 느렸던 영국과 이탈리아조차 각각 약 1.6배가 증가했는데, 프랑스는 겨우 1.2배가 증가했을 뿐이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금본위제에 끝까지 집착했던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벨기에가 먼저 시행한 것처럼 평가절하를 통해 과대평가를 시정함으로써 세계 경제추세에 동참해 급속히 경제가 회복되었다. 네덜란드는 무역이 활기차게 되살아나 1936년의 첫 9개월 동안 수출이 월간 4,500만 길더에서 1937년 6월에는 9,000만 길더로 급증했다. 스위스의 회복도 마찬가지로 대폭적이어서 수출이 6,800만 스위스 프랑에서 1937년 9월에는 1억 2300만 스위스 프랑으로 급증했다. 그 이전에 벨기에는 1935년에 새롭게 집권한 반 젤란트Paul V. Zeeland 정권이 경제회복을 위해 3월 29일 의회에서 비상대권을 받아내고, 4월 2일에는 28%의 평가절하를 시행했다. 환율은 3월의 54.5에서 68로, 1년 후에는 75로 올랐다. 이로써 생산과 수출 및 벨기에 국립은행의 금 보유고가 모두 회복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금본위제에 기반한 프랑의 가치유지 그리고 이를 위한 디플레이션정책이 얼마나 처참한 실패를 불러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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