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은 금융시장의 신용경색까지 불러왔다
환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자 미래의 수요가 현재로 이동해왔고, 외환시장에서는 또다시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심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해 여름부터 9월 외환위기설이 떠돌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국내 일부 세력과 결탁하여 환투기를 감행 했고, 그 바람에 환율은 더 급등해 9월에는 1,100원을 넘어섰다. 10월에는 1,200원을 넘고 그 후로도 환율은 거침없이 오르면서 11월 말경 한때 1,50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렇게 환율이 크게 오르면 물가뿐 아니라 금융시장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환율이 크게 상승하면 외국에서 돈을 빌려온 국내 금융회사들과 기업들은 그만큼 환차손을 입는다. 예를 들어, 환율이 1,000원일때 1억 달러를 들여왔다면 1,000억 원을 빌린 셈이지만 환율이 1,500원으로 상승하면 이자를 제외하더라도 1,500억 원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환차손만 따지더라도 500억 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2007년 말까지 국내 은행과 국내 기업이 외국에서 빌려온 외채는 각각 약 1,000억 달러로 총 2,000억달러에 달했으므로 가만히 앉아 우리 돈으로 100조원 이상을 추가로 더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만 것이다.
기업은 돈을 쉽게 구하지 못해 외채를 갚지 못했으므로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은 돈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서둘러 외채를 갚았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환율이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한 2008년 3/4분기에는 대외채무 중 38억 달러를 순상환했고, 폭등으로 바뀐 4/4 분기에는 무려 241억 달러를 상환했다. 그 합계는 우리 돈으로 약 33조 원에 해당한다. 이는 본원통화 약 39조 원의 85%에 달하고, 협의통화(M1) 332조 원의 거의 10%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그 결과 국내 금융시장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금융시장이 이렇게 신용경색을 일으키면 국내 경기도 빠르게 하강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4/4분기의 전기대비 성장률이 무려 -16.8%를 기록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이 왜 그처럼 심각한 경기하강을 불러온 걸까? 금융시스템은 우리 몸의 혈관계와 비슷하다.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중앙은행은 우리 몸에서 피를 생산하는 등뼈이자 심장이고, 은행 등의 금융시스템은 우리 몸의 정맥과 동맥으로 이뤄진 핏줄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금융시장에서 유통되는 통화는 경제에서 우리 몸의 혈액과 같다. 우리 몸에서 혈액이 줄어들면 손발을 비롯한 여러 신체조직이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 활동력이 떨어지고, 자칫 신체의 모든 기능이 약화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경제에서 금융시장은 이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통화는 신용창조를 하기 때문이다. 신용창조가 일어난다면 신용수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이나 기업이 외채를 갚을 경우 협의통화나 광의통화, 광의유동성은 그 신용승수만큼 줄어드는 압력을 받는다. 외채를 갚으려면 금융시장에서 돈을 회수해야 하고 돈을 회수하면 대출이 줄어들어 시중의 돈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예금도 줄어드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 결과 2008년 우리 경제가 경험한 바와 같이 시중의 돈이 바짝 마르게 되어 투자와 거래가 크게 줄어들면서 경기가 급락하게 된다.
환율은 경기의 급상승을 일으키기도 했다
2008년에는 추락하기만 하던 국내 경기가 2009년에 들어서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그 원인 역시 환율 때문이다. 환율이 하락하자 외국 자본은 환차익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국 자본의 국내 유입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곧 해외 소득의 국내 이전을 의미하며, 이것이 국내 소득을 키우고, 이어서 구매력을 키워 국내 경기를 급상승시킨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표에서 보듯이 2008년 3/4분기에는 자본수지가 62억 9,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성장률도 -0.4%를 기록했고, 4/4분기에는 자본수지가 426억 3,000만 달러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면서 성장률은 -16.8%로 뚝 떨어졌다. 다행히 2009년 1/4분기에는 자본수지 적자가 크게 줄면서 경기하강이 거의 멈췄고 전기대비 성장률은 0.7%를 기록했다. 그 뒤 2/4분기와 3/4분기에는 자본수지가 각각 86억 8,000만 달러와 144억 달러의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성장률도 높아져 각각 9.8%와 13.4%라는 놀라운 실적을 기록했다.
한편 2009년 4/4분기에는 성장률이 0.7%로 뚝 떨어졌는데, 그 원인은 환율과는 상관이 없다. 이는 3/4분기에 기록했던 13.4%라는 성장률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보다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에 이처럼 경기상승이 과속을 보이면 경제는 탈진증상을 보이게 마련이고 이에 따라 성장률이 뚝 떨어지곤 한다. 마치 5km 구간을 15 분대에 뛸 능력을 가진 선수가 13분대에 뛰면 탈진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4/4분기 성장률은 0.7%를 기록했는데, 이는 시속 137km를 달리던 자동차가 7km로 속도를 낮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2010년 1/4분기에도 자본수지가 57억 1,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고 이에 성장률도 8.8%로 높아졌다. 그렇지만 2/4분기에는 자본수지가 41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자 경상수지가 103억 5,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은 다시 5.8%로 낮아졌다. 2010년에 들어서면서 성장률이 이처럼 들쭉날쭉해진 것도 환율 때문이다.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면 경기상승 추세가 2/4분기에도 이어질 수 있었으나 정책당국이 환율을 공격적으로 방어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환율을 상승시킨 탓에 자본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는 결국 2/4분기 이후의 경기하강을 불러왔다.
문제는 환율이다
흔히 환율은 화폐의 대외가치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규정으로는 환율이 한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환율은 국민경제의 체력과 건강의 척도라고 본다. 환율이 상승하면, 즉 화폐의 대외가치가 떨어지면 국민경제의 건강과 체력이 그만큼 나빠진 것을 의미하고 환율이 하락하면, 즉 화폐의 대외 가치가 상승하면 국민경제의 건강과 체력이 그만큼 양호해진 것으로 봐아 한다. 따라서 환율은 어느 경제지표 못지 않게 중요하다. 경제체력을 잃으면 경제활동이 약화되고, 경제활동의 약화는 결국 경제난이나 경제위기를 부르고 만다.
물론 경제의 건강과 체력이 환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환율 이외에도 물가상승률과 기업 경영수지, 국가 재정수지 등의 경제변수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물가와 환율이 불안해지면 경제의 건강과 체력이 크게 훼손되며, 기업수지와 재정수지가 장기간 악화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반면 물가와 환율이 안정적일수록, 정부 재정수지와 기업 경영수지가 양호 할수록 더 높은 성장률을 지속할 수 있으며, 심각한 경제위기와 같은 만약의 사태에 직면해도 비교적 쉽게 이겨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경제의 건강과 체력을 진단하는 기초적인 경제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환율이다. 환율이 점진적으로 떨어지면 물가가 안정되고 경기도 상승하며, 이에 따라 정부 재정수지나 기업 경영수지도 호전되는 경향이 있다. 환율이 점진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경제의 건강과 체력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경제실적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환율은 국내 재화의 대외가치를 뜻하기도 한다. 국내 재화의 대외가치는 환율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물가는 재화의 국내 가치를 뜻하므로 물가와 환율은 대외가지의 측면에서 보면 동의어다. 국내 물가가 높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국내 재화의 가치가 낮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율정책은 물가정책을 포함하며, 환율과 물가는 경제의 건강성을 진단하는 가장 기초적인 지표인 셈이다.
환율과 물가가 경제의 건강과 체력을 진단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척도로 꼽히는 이유는 이것이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국제경쟁력이 향상되면 환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악화되면 환율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성장잠재력이 높아지면 물가는 상대적으로 더 안정되고, 떨어지면 물가는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상승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일본 경제는 다른 나라들, 특히 미국과의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의 경쟁에서 이겼을 때는 초장기 경제번영을 누렸고, 그 결과 1인당 국민소득이 한때 미국을 훌쩍 넘어서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는 환율의 점진적인 하락이 그와 같은 결과를 빚은 것이다. 당시 일본 기업은 미국 경제의 상징인 록펠러 빌딩을 매입하고, 미국 문화의 상징인 영화사들을 상당수 사들였으며, 세계적인 미술품이나 골동품을 무차별 매집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미국과의 성장잠재력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물론 환율정책이 실패한 뒤부터 일본 경제는 초장기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을 외면한 환율 정책을 펼침으로써 단군 이래 최대의 난리라던 환란, 즉 외환위기를 겪었고, 그 여파로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가 100만 명이 넘었고 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났다. 흑자를 기록하던 기업들까지 부도를 내는 등 3만 개 이상의 기업들이 도산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의 강력한 보호를 받던 종합금융회사들 역시 거의 모두 도산했으며, 다른 금융기관들도 3분의 1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은행들마저 이런저런 짝짓기를 통해 겨우 생존을 유지했다.
(다음에 이어서)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최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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